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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anuary 5, 2012

unrepentant Korea, "Demands apology "and " Curse of Confucianism" by Ko Bunyu 「立ち直れない韓国」 黄文雄

http://mirror.jijisama.org/syokuminti3.htm#zensei2


韓国の教科書に載らない日本の善政 その2
朝鮮総督府が、朝鮮半島で断行した最大の改革の一つは「門閥廃止」、「万民平等」という社会改革であった。それは、朝鮮史上、初めての階級差別の廃止であった。

Japanese wisely govern not written in Korean textbooks part2
one of the largest reform in carrying out for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in Korean Peninsula was the social reformer that "disuse the pedigrees" and "all people are equally" .
it was the first abolition of class distinctions in the history of Korea.

「立ち直れない韓国」 黄文雄 1998年 光文社
立ち直れない韓国―“謝罪要求”と“儒教の呪い” (カッパ・ブックス) [新書]
unrepentant Korea, "Demands apology "and " Curse of Confucianism" by Ko Bunyu established in 1998 Kobunsha




http://kobunyu.jp/
Ko Bunyu (Taiwanese)

朝鮮総督府(ちょうせんそうとくふ 조선총독부)
金玉均 김옥균 Kim Ok-gyun




甲申政変、1884年12月4日(時憲暦光緒十年十月十七日)
The Gapsin Coup (갑신정변, :甲申政變) was a failed 3-day coup d'etat which started on 4 December 1884 in the late Joseon Dynasty of Korea.

the primordial cause of the difficulty in the Korean social revolution, that was caused in the traditional class systems.

Reformers like Kim Ok-gyun at the age of The Gapsin Coup who pointed out that the primary cause for the korean corruption affairs and debilitating national power what were roots from the institutional inequality and feudal pedigree status in Korean society.

Ryanban class was defined the traditional status system not their abilities or talents but by an innate blood relations.

finally korean peninsula declared "equality for all people" in 1894. Since the time, the depressed classes (slaves,etc) could have family register same as Yangban;noble class or Yangmin ;good people (included Yangban,chungin ; middle people,sangmin ; common people ) at long last attributed be amended Family Registration Law.

However, The Gapsin Coup failed after only three days rul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bolished the class distinctions by law in effect.

class in Joseon

両班 양반 량반(yangban) - 中人 (chungin) - 常民 (sangmin) - 賎民 (chunmin〔for example, 奴婢 (nobi), 巫堂 (mudang) or 白丁 (baekjeong)〕)

李氏朝鮮王朝時代には、良民 양민(백성) (両班、中人、常人)と賤民(奴婢、白丁)に分けられる身分階級の最上位に位置していた貴族階級に相当する。

노비(奴婢) nobi
공노비(公奴碑) Gon-nobi ; public slave 와 개인에 소속된 사노비(私奴碑) San-nobi ; private slave 사원에 속한 사노비(寺奴婢) Sanobi ; temple sanobi

정종(靖宗) 5년(1039년)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 : 어머니의 신분 출신에 따라 그 신분이 결정됨)의 제정과 호적제도(戶籍制度)가 완성됨에 따라 노비는 완전히 신분이 통제되었다.

천자수모법 賤者隨母法 the law of servants following heredity for mother's class



at late of Joseon dynasty, nobi;slaves were divided by public servants (slaves belonged to the office) and private (slaves were owned by noblemen, etc.)
the private servants were a few boys, almost were girls.
nobi (slave girl; Kisaseng Gisaeng) were sold by 30 yen (currency about $5000) still in annexed japan and korea.
nobi had not certain husband, there was a custom she had change some husband among some.
however nobi;servants were owned by his master, also born their children were belonging to the owner, they were resold, if the descendants of nobi was a girl, of cause her children were as slaves,then told that nobi could not float in rapid riper. (they were real sexual slavery).

quoted from "The History of Korean agricultural development", "Policy"
edited by Kobayakawa Kurow,published Yuho kyokai

Korean farmers were differentiated from Ryanban;noble class,also baekjeong ;white cloth slave class (discriminated untouchable people) had been discriminated from farmers.
in this class society, there was always a lot of trouble.
Ills in Korean society like this is not a problem never can be overcome in overnight.

also it can be said in today's Korean society today. because The Gapsin Coup was failed in "3-day coup", by order of the King "Gapsin political principle" had been recovered, we can not know the exact draft.
the concrete content of "Gapsin political principle" has come down to today's, the details are vary slightly depending on materials.
in any case,full-scale social reform as a modern nation, should say that from the Japan Government-General of Korea.




「立ち直れない韓国」 黄文雄 1998年 光文社 (かっこ内管理人補足)

朝鮮の社会革命の難しさの根源は、その伝統的な身分階級制度にある。甲申改革当時の金玉均ら改革派たちの主張によれば、朝鮮社会の門閥や封建的身分制度こそ不平等の根源、国政腐敗、国力衰弱の主因と指摘している。両班階級は、その能力や才能とは無縁な生まれつきの血縁関係によって規定される伝統的な身分制度であった。朝鮮半島は、1894年になって、ようやく「四民平等」を宣言した。そのときから、賎民(奴婢など)もやっと両班や良人と同じように戸籍を持つように戸籍法が改正された。しかし、甲午改革は「三日天下」ですぐに失敗した。朝鮮総督府は、実質的に法律によって階級差別廃止を行なったのであった。

李朝末期には、奴婢が公賎(官庁に所属した奴婢)と私賎(両班などに所有された奴婢)に分けられ、私賎は男子が少なく、女子がほとんどであった。婢(女の奴隷)は日韓併合当時、まだ一人三十円で売られていた。婢に特定の夫はおらず、何人かの間で替えていくのが風習であった。しかし、婢は主人の所有物であったから、その生まれた子供もまた主人の所有に属し、その子もまた転売されていくので、婢の子孫は、女子であれば、ほとんど世々代々奴隷として浮かぶ瀬あらんやといわれた(まさしく性奴隷)(『朝鮮農業発達史』『同・政策編』小早川九郎編著、友邦協会)。

朝鮮農民は、両班に差別され、白丁(被差別民)がまた農民に差別された。この階級社会ではトラブルが絶えなかった。このような朝鮮社会の病弊は、けっして一朝一夕で克服できる問題ではない。今日の韓国社会に至ってもそういえる。甲申改革は「三日天下」で失敗に終わったから、国王の命令によって「甲申政綱」が回収されたために、その正確な原案を知ることができない。今日に伝わっている「甲申政綱」の具体的内容は、資料によってその詳細が多少異なる。いずれにしても近代国家としての本格的社会改革は、朝鮮総督府からであったというべきだろう。

また、李朝時代の地域的差別は、西北地方と東北地方の出身者が、完全に官界から排除され、官吏は中央だけから送られた。もちろん、国家による地方差別は公然と制度化された。『経国大典』には、咸鏡道、平安道、黄海道の人は、官憲への登用はもちろん、鷹師への起用さえ禁止する条項があったほどだ。平安道人は、平安道奴、西漢、平漢、平奴、避郷奴と蔑視されていた。朝鮮総督府はこれらの差別を廃止したが、残念ながら、今日の韓国社会では、地域的な差別が厳然として存在している。それは朝鮮半島の永遠なる民族的課題とさえいわれている。このような見捨てられた地方民、つまり東北、西北朝鮮の地方民は、被差別民だから、門閥を重んじる京城の両班たちは、ほとんど西北地方の人との婚姻を禁止し、つき合いさえなかった。というのは、東北、西北の地方民は、ほとんど任官を受けられなかったので、婚戚関係を持ったところで何の役にも立たないからである。ましてや京城の人間から見れば、東北、西北地方は、重罪人の禁固や流配の地にすぎなかった。咸鏡道人を「水売り」、「咸鏡道奴」、「咸鏡ネギ」と軽蔑し、敬遠するのは、伝統的な差別意識からくるものであった。

人種差別や地域差別は、朝鮮半島だけではなく、日本人社会にもある。韓国人、朝鮮人に対して、優越意識を持っている日本人のいるのは確かであろう。しかし、李朝社会ほどの人種差別と地方差別を持つ民族は、ほとんど考えられない。朝鮮総督府は、日韓合邦後、「内地延長主義」の原則をずっと堅持しつづけていた。それは朝鮮半島にとって、まさしく破天荒な政治原則であった。仮りにそれがしばしば有名無実であっても、少なくとも李朝以来、あるいは遠く溯れば三韓、三国時代以来の地域差別、さらに李朝以来の階級差別の歪みを是正する、一つの大きな契機となっていた。今日の韓国社会は人種差別にも、地域差別にも、悩みつづけている。しかし、階級差別を法的に禁止したのは朝鮮総督府時代からである。朝鮮総督府の時代は、多くの失政もあったことは確かであろうが、政治的変革以上に大きな社会変革を完遂した。この事実については、李朝体制を視野に、その延長としての朝鮮総督府とは何かをその原点から見ることが必要ではないだろうか。

李朝社会は、なぜあれほどしつこく自ら韓民族を両班、中人、良人(常民)、賎民に分け、厳しく階級差別したのであろうか。その理由は「礼儀之邦」という考え方にある。法治社会が確立される前に、階級社会を規定するものは「礼」であった。中国では周の時代には、だいたい「繁文縟礼」(こまごまと規定されている規則・礼式など)によってすべての人間関係が規定されていた。「法」が「礼」に代わって人間の社会的諸関係を規定するようになったのは、春秋戦国時代からである。朝鮮があれほど「朱子家礼」(朱子学による規範)に心酔し、繁文縟礼にとらわれつづけてきたのは、その国王、両班を中心とする階級支配を維持するために、必要だったからである。

近代国民国家の「国民」を創出するために、朝鮮総督府が断行した「奴婢の解放」は、もし朝鮮社会の牢固たる階級制度について、多少でも歴史認識があれば、それはリンカーン大統領の「奴隷解放」以上のものと驚嘆かつ称賛するに違い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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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下は「宮廷女官チャングムの誓い」のホームページから抜粋

宮廷女官って?(階級・身分制度)

朝鮮王朝の身分制度は、少数の支配者層とその他大勢の被支配者層から成り立つピラミッド状の構造でした。すなわち王、両班、中人と、良人、賎民に分かれていました。貴族的特権階級の両班(ヤンバン)は官僚職を事実上独占、世襲する人々で、それに続く中人(チュンイン)は、科挙<注釈5>の雑科に合格し、通訳、陰陽学、医学、音楽などの技術系官職に従事する人々を指しました。良人(ヤンイン)は常民とも言われ、その大部分は農民でした。良人にも科挙の受験資格がありましたが、納税や多様な役の負担を強いられ、勉強する余裕などありませんでした。最下層の賎民のうち、最も多くを占めたのは公私の奴婢で、最も差別をうけたのは白丁(ペクチョン)です。奴婢は、宮廷などで働く公奴婢と両班などの私人に属する私奴婢に分かれ、合わせて全人口の十~数十%を占めていました。同じ賎民でも白丁は職業、居住地、衣服にわたるまで厳しい制限と強い差別をうけていました。

王とその一族が暮らす宮殿には、多くの女官が働いていました。女官たちはそれぞれ専門職を持ち、また全員が王と婚姻関係にあるとみなされ、実質はその生涯を独身ですごしました。女官になるには、幼いうちに宮中に入り、まずは見習い<センガッシ>として仕事を始めます。その過程でさまざまな選抜を経て一人前の女官<内人:ナイン>になるのです。見習い時代を含め約30数年の年功を積み、ふさわしいと認められれば、女官の中で最も高い身分「尚宮(サングン)」の地位を与えられます。ドラマに登場する最高尚宮(チェゴサングン)は、水剌間(スラッカン)<注釈6>の女官を束ねる責任者のことで、最高尚宮の上に立ちすべての女官を統率するのが女官長、提調尚宮(チェジョサングン)でした。


한국의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 일본의 선정 그 2조선 총독부가, 한반도(朝鮮半島)에서 단행한 최대의 개혁의 하나는 「문벌폐지」, 「만민평등」이라고 하는 사회개혁이었다. 그것은, 조선 역사상, 처음의 계급차별의 폐지이었다.

「서 직접 れ 없는 한국」황 후미오(文雄) 1998년 고분샤(괄호내 관리인보충)조선의 사회혁명의 어려움의 근원은, 그 전통적인 신분계급 제도에 있다. 마사루(甲) 신(申) 개혁 당시의 김옥균들 개혁파들의 주장에 의하면, 조선 사회의 문벌이나 봉건적신분제도야말로 불평등한 근원, 국정부패, 국력쇠약의 주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양반계급은, 그 능력이나 재능과는 무연인 타고난 혈연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전통적인 신분제도이었다. 한반도(朝鮮半島)는, 1894년이 되고, 드디어 「사민평등」을 선언했다. 그 때부터, 賤국민(노비등)도 드디어 양반이나 요시히토(良人)와 같이 호적을 가지게 호적법이 개정되었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삼일 천하」에서 곧 실패했다. 조선 총독부는, 실질적으로 법률에 의해 계급차별 폐지를 한 것이었다.

이조말기에는, 노비가 공공賤(관청에 소속한 노비)이라고 나賤(양반등에 소유된 노비)에 나눌 수 있어, 나賤은 남자가 적고, 여자가 대부분이었다. 婢(여자의 노예)은 일한 병합 당시, 아직 한사람 30엔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婢에 특정한 남편은 접지 않고, 몇사람인가의 사이에 바꾸어 가는 것이 풍습이었다. 그러나, 婢는 주인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에, 그 태어난 어린이도 또 주인의 소유에 속하고, 그 아이도 또 전매되어 가므로, 婢의 자손은, 여자라면, 대부분 대대 노예로서 볕들 날 있지 않은 고용해 깨졌다 (바로 성노예) (『조선 농업발달사』 『동(同)·정책편』고바야카와(小早川) 9낭 편저, 우방협회).

조선 농민은, 양반에 차별되어, 흰정(피차별 국민)이 또 농민에게 차별되었다. 이 계급사회에서는 트러블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조선 사회의 병폐는, 결코 일조일석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 이르러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마사루(甲) 신(申) 개혁은 「삼일 천하」에서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국왕의 명령에 의해 「마사루(甲) 신(申) 정강」이 회수되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초안을 알 수 없다. 오늘에 전해지고 있는 「마사루(甲) 신(申) 정강」의 구체적 내용은, 자료에 의해 그 상세가 다소 다르다. 어떻든간에 근대 국가로서의 본격적 사회개혁은, 조선 총독부로부터이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 이조시대의 지역적 차별은, 서북지방과 도호쿠 지방(東北地方)의 출신자가, 완전히 관계에서 배제되어, 관리는 중앙만으로부터 보내졌다. 물론, 국가에 의한 지방차별은 공연이게 제도화되었다. 『경국대전』에게는, 함(咸) 가가미(鏡) 길, 헤이안(平安)길, 황해 길의 사람은, 관헌에의 등용은 물론, 다카시(鷹師)에의 기용마저 금지하는 조항이 있었을 만큼이다. 헤이안(平安)도인은, 헤이안(平安)길놈, 서한, 다이라(平) 간(漢), 평놈, 避향놈과 업신여겨지고 있었다. 조선 총독부는 이 차별을 폐지했지만, 유감스럽지만, 오늘 한국 사회에서는, 지역적인 차별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한반도(朝鮮半島)가 영원한 민족적 과제라고마저 말해지고 있다. 이러한 버릴 수 있었던 지방국민, 즉 동북, 서북한의 지방국민은, 피차별 국민이기 때문에, 문벌을 중요시하는 교토성의 양반들은, 대부분 서북지방의 사람과의 혼인을 금지하고, 교제마저 없었다. 이라고 하는 것은, 동북, 서북의 지방국민은, 대부분 임관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婚戚관계를 가진 바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토성의 인간에게서 보면, 동북, 서북지방은, 중죄인의 금고나 나가레(流) 나누어 주기의 땅에 지나지 않았다. 함(咸) 가가미(鏡) 도인을 「물판매」, 「함(咸) 가가미(鏡) 길놈」, 「함(咸) 가가미(鏡) 파」라고 경멸하고, 경원하는 것은, 전통적인 차별 의식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인종 차멸이나 지역차별은, 한반도(朝鮮半島)뿐만 아니라, 일본인사회에도 있다. 한국인, 조선인에 대하여,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이 있는 것은 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이조사회 정도의 인종 차멸과 지방차별을 가지는 민족은, 대부분 생각될 수 없다. 조선 총독부는, 일한 합 구니(邦)후, 「내지연장 주의」의 원칙을 쭉 계속해서 견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반도(朝鮮半島)에 있어서, 바로 전대미문인 정치원칙이었다. 만약 그것이 자주 유명 무실이여도, 적어도 이조 이래,혹은 멀리 거슬러 오르면 3한, 3국시대 이래의 지역차별, 더욱 이조 이래의 계급차별의 비뚤어짐을 시정(是正)하는, 하나의 큰 계기가 되고 있었다. 오늘 한국 사회는 인종 차멸에도, 지역차별에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계급차별을 법적으로 금지한 것은 조선 총독부시대부터다. 조선 총독부의 시대는, 많은 실정도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정치적 변혁이상에 큰 사회변혁을 완수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이조체제를 시야에, 그 연장으로서의 조선 총독부는 무엇일지를 그 원점에서 보는 것이 필요해서는 잔잔해졌을까?

이조사회는, 왜 저것 정도 끈질기게 스스로 한 민족을 양반, 중인, 요시히토(良人)(상민), 賤국민에게 나누고, 엄격하게계급 차별한 것일까? 그 이유는 「예의之구니(邦)」라고 하는 사고방식에 있다. 법치사회가 확립되기 전에, 계급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예」이었다. 중국에서는 주의 시대에는, 대체로 「번문 욕례」 (겨우겨우 규정되고 있는 규칙·예식등)에 의해 모든 인간 관계가 규정되고 있었다. 「법」이 「예」를 대신해서 인간의 사회적 제관계를 규정하게 된 것은, 춘추전국시대부터다. 조선이 저것 정도 「아카네(朱子)가 예」 (주자학에 의한 규범)에 심취하고, 번문 욕례에 계속해서 얽매여 온 것은, 그 국왕, 양반을 중심으로 하는 계급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근대국민국가의 「국민」을 창출하기 위해서, 조선 총독부가 단행한 「노비의 해방」은, 만약 조선 사회가 견고한 계급제도에 대해서, 다소라도 역사 인식이 있으면, 그것은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이상의 물건이라고 경탄 동시에 칭찬하는 것이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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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궁정궁녀 대장금」의 홈페이지에서 발췌 궁정궁녀 말야? (계급·신분제도)조선 왕조의 신분제도는, 소수의 지배자층과 기타 많은 사람의 피지배자층으로부터 구성되는 피라미드 장의 구조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왕, 양반, 중인과, 요시히토(良人), 賤국민에게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귀족적 특권계급의 양반 (양 밴)은 관료직장을 사실상독점, 세습하는 사람들로, 거기에 계속되는 중인(【쥰인】)은, 과거 <주석5>의 잡과에 합격하고, 통역, 음양학, 의학, 음악등의 기술계 관직에게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요시히토(良人)(양 인)은 상민이라고도 일컬어져, 그 대부분은 농민이었습니다. 요시히토(良人)에게도 과거의 수험 자격이 있었습니다만, 납세나 다양한 역의 부담을 강요당하고, 공부하는 여유등 없었습니다. 최하층의 賤국민 가운데, 가장 많이를 차지한 것은 공사의 노비에서, 가장 차별을 받은 것은 흰정(【페쿠촌】)입니다. 노비는, 궁정등에서 일하는 공공노비와 양반등의 개인에게 속하는 나노비에 갈라지고, 맞추어 전인구의 10∼몇십%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賤국민이라도 흰정은 직업, 거주지, 의복에 와타루까지 엄격한 제한과 강한 차별을 받고 있었습니다.

왕과 그 일족이 생활하는 궁전에는, 많은 궁녀가 일하고 있었습니다. 궁녀들은 각각 전문직을 가지고,또 전원이 왕과 혼인 관계에 있으면 간주되어, 실질은 그 생애를 독신으로 보냈습니다. 궁녀가 되기 위해서는, 어린 동안에 궁중에 들어가고, 우선은 견습 <【센갓시】>로서 일을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선발을 경과해서 제구실을 할 궁녀 <내인 :나인>이 되는 것입니다. 견습 시대를 포함시켜 약30몇년의 연공을 쌓고, 어울리다고 인정을 받으면, 궁녀 안(속)에서 가장 높은 신분 「히사시(尙) 미야(宮)(【산군】)」의 지위를 주어집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최취미궁(신사)(【졔고산군】)은, 물剌사이(【스랏칸】) <주석6>의 궁녀를 묶는 책임자로, 최취미 미야노우에(宮上)에 서 모든 궁녀를 통솔하는 것이 궁녀장, 쓰쓰미(提)조 히사시(尙) 미야(宮)(【졔죠산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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