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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November 12, 2011

welcoming China ambassadors to Korea gate for obligation 迎恩門

영은문

you can see the copied "Arc de Triomphe in Paris France" in Korea, since japanese Governor-General of Ko"Independence Gate in Seoul" 独立門 in 1897 instead of The Yeongeunmun ("welcome China gate for obligation) 迎恩門 that were copied of Triumphe.rea built

獨立門前兩個門柱的真相
http://ask.nate.com/qna/view.html?n=9689661 영은문에 대해 알려주세요 pes5168 | 09.09.06 12:35 답변 1 조회 63
네티즌공감 영은문에 대해 알려주세요 태그영은문 일촌 및 팬들에게 공감한 내용이 전달됩니다. 싸이월드 공감 1 의견(0)신고 답변을 등록하시면 마일리지 3점, 채택되면 30점을 더 드립니다. choalex 님의 답변 09.09.06 14:39 답변공감질문자 한마디궁금증을 해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입니다. 영은문(迎恩門)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문으로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입니다. 현재 독립문이 있는 곳의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새 임금이 즉위하여 중국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1407년(태종 7)에 송도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모화루를 세웠다가 1430년(세종 12)에 모화관으로 개칭하여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습니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金安老) 등 3정승이 계(啓)하여 모화관 남쪽의 홍살문을 개축하여 청기와를 입히고 영조문(迎詔門)이라는 액자를 걸었습니다. 1539년 명나라 사신 설정총(薛廷寵)이 칙사가 올 때에는 조(詔)·칙(勅)과 상사(賞賜)를 가지고 오는데, 영조문이라 함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고 영은문(迎恩門)이라 써서 걸도록 하여 이에 따라 이름을 고쳤습니다. 임진·정유 왜란 후인 1606년(선조39) 영은문을 재건한 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와서 액자를 다시 써서 걸었는데, 그 액자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청일전쟁 후인 1896년 모화관은 사대사상의 상징물이라 하여 독립관(獨立館)이라 고쳐 부르고,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독립문을 세웠습니다. 영은문의 기둥을 세웠던 초석은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독립문 바로 앞쪽에 있습니다. 주초석은 방형의 배흘림 장초석(長礎石)인데 4방의 모를 죽여 8각같이 보이고 위에는 가구구조(架構構造)를 고정시켰던 홈이 있습니다. 출처 :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42779 http://www.sscmc.or.kr/culture2/introduce/parking_around06.asp
독립문(獨立門; 사적 제32호) 1895년 2월(고종 32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徐載弼) 박사가 조직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우리나라가 중국·일본·러시아와 그 밖의 서구열강과 같은 자주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선포하기 위해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하고, 1896년 7월부터 최초로 전 국민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한 성금으로 공사를 시작하였다. 독립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았고 높이 14.28m로 45㎝×30㎝ 규격의 백색화강암 1,850여 개로 세워졌다. 중앙에는 아치형의 홍예문 모양으로 되어 있고,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이화(李花)무늬가 방패모양을 한 문양판에 새겨져 있다. 내부의 왼쪽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또한 상단에는 ‘독립문’이 한글로 새겨져 있고, 반대편에는 ‘獨立門’이란 한자가 새겨져 있다. 설계는 서재필의 구상아래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도와 세부설계도를 작성하였고, 공사감독은 조선인 심의석(沈宜碩)이 맡았으며, 일은 중국인 노무자를 고용하였다. 1896년 11월 21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하였으며 총 공사비는 그때 화폐로 3,825원이 들었다. 독립문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현재의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70m 떨어진 독립문 네거리 중간지점에 있었는데,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1979년 12월 31일에 현재 위치로 옮겨 복원하고 옛 자리에는 ‘독립문지’라고 새긴 표지판을 묻어 놓았다. http://blog.daum.net/sonsang4/13740082


[답사]독립문(獨立門) & 영은문주초(迎恩門柱礎) 탐방

(2010/12/18 현재)


(사)서울문화사학회의 제241회 답사지로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독립공원에 있는 독립문(獨立門과 영은문주초(迎恩門柱礎) 탐방전경 입니다 




◈ 독립문(獨立門)

-종    목 사적 제3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941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는 조선 말기의 석조문. 높이 14.28m, 너비 11.48m. 사적 제32호. 지정면적 2,715.8㎡. 갑오경장 이후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려고 중국사신을 영접하던 사대외교의 표상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문으로서, 자주 민권과 자강운동의 한 기념물이다.

1896년(건양 1) 미국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발의로 국왕의 동의를 얻어 뜻있는 많은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광범위한 호응을 받아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여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하였다. 이 문의 건축양식은 서재필의 구상에 의하여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하였으나, 미적 배려가 부족하고 석재의 조적수법도 재래성벽의 수법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서재필의 자서전에 의하면 설계는 독일공사관의 스위스 기사가 하고, 우리나라 목수가 시공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경성부사 京城府史≫에는 러시아인 사바린에 의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확실하지 않다. 구조는 화강석 쌓기로서 중앙에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내부 왼쪽에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홍예문의 이맛돌에는 이화문장(李花紋章)이 새겨져 있고, 그 위의 앞뒤 현판석에는 각기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 앞에는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은문 주초 2개가 서 있다. 이 문은 1917년 수리 공사를 한 적이 있고, 1928년에는 기초가 내려앉을 위험이 있어 조선총독부에서 공사비 4000원을 들여 경성부에 위탁하여 크게 수리한 바 있다. 그 당시 벽체 안쪽에 새로운 재료인 철근콘크리트를 보강하였다.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이전이 불가피하게 되어 그 자리에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13. 서울특별시장’이라고 새겨진 기념동판(가로·세로 각 70㎝)을 묻고 원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이전공사는 1980년 1월에 끝났다.<문화재청 & 네이트 백과사전 에서>

▶독립문(獨立門) - 위키백과

독립문(獨立門)은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독립국임을 상징하기 위해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지은 문으로 세레딘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 士巴津, Sabatin, 흔히 사바틴)이 설계했고, 그 현판은 이완용의 작품이다.

청일 전쟁 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6년에 공사를 시작해 1897년에 완공되었다. 높이는 14.28미터, 폭 11.48미터이다.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아서 만들었다. 현판은 이완용이 썼고 , 현판 바로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양인 오얏꽃이 장식되어 있다.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로 70미터 정도 이전하였고, 2009년 10월 28일에 서대문 독립공원의 재 조성 공사가 완료되면서 동시에 독립문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독립문에 대한 소고(小考)

서대문구에 위치한 독립문은 중국(청나라)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의 정문인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1896년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이 조직한 독립협회 발의로 고종의 승인을 얻어 1896년 11월 주춧돌을 놓는 정초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월 1년만에 완공했다. 그러나 이 독립문이 청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에 대해 일본에 감사의 표시로 건립된 것이라는 점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일부는 인근에 있는 서대문형무소와 결부하여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독립운동 탄압의 현장인 서대문형무소 자리에는 독립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바로 옆에 독립문이 서 있어 독립의 의미를 구분하는데 혼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서대문형무소 자리에서 독립문 쪽으로 내려다보면 3.1독립선언 기념탑이 있고 그 아래로 오른손에 독립신문을 들고 선 서재필 동상의 뒷모습이 보인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실패 후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탈출한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 가 "필립 제이슨"이란 이름의 미국인이 되어 돌아왔다. 1896년, 미국인 고문으로 귀국한 필립 제이슨(서재필)과 정부대신 이완용 등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그 첫 사업으로 나라의 독립을 기념하는 “독립문”을 건설하기로 한다. 당시 조선은 일제식민지 이전의 자주 독립국이었음이 분명한데 왜 독립이라는 말을 썼을까? 그 이유는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사대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움으로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인 것이다. 독립협회는 조선독립을 기념할 근거를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뒤 일본과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에 두고 있다. 조약문에는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종주권 포기”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독립협회는 외국 의존을 반대하는 애국자들이 모여 나라의 자주 독립을 표방하여 결성한 것이다. 그러나 참여자들 중 이상재, 주시경 선생을 빼면 거의 모조리 친일인사가 장악하고 있었다. 한일합방이 있은지 얼마 후 일본은 조선 침략에 공이 큰 자들에게 돈과 귀족작위를 주게 되고 독립협회의 간부들 거의 모두가 합방공신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서 독립협회의 실체를 알 수가 있다. 독립협회가 나라의 운명이 기울던 구한말, 서구의 선진 사상을 소개하고 나라를 근대화하는 데 역사적 공헌을 한 것도 사실이요 그들의 대부분이 친일파였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또한 독립문 상단 앞뒤에 한자와 한글로 “독립문”이라고 새겨진 글씨가 이완용이 쓴 것이라고 한다. 이완용은 그 당시 독립협회의 발기인 가운데 보조금도 가장 많이 냈고, 위원장으로서 독립문 건립 사업을 주도했다.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에는 “내동리 명물”이라는 연재물이 수록되어 있고, 독립관과 독립문을 다룬 기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있다.

"교북동 큰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불란서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비슷합니다. 이 문은 독립협회가 일어났을 때 서재필이란 이가 주창하여 세우게 된 것이랍니다. 그 위에 새겨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라는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귀족 영수 후작각하올시다."

이상의 사실에서 독립협회가 청으로부터의 조선독립을 기념함과 아울러 이를 가능케 해준 일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세운 것이 "독립문"임을 알 수 있다. 이쯤되면 반일사상이 투철한 이들은 당장에라도 그 독립문을 철거하자고 주장함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독립문은 현재 우리의 중요한 역사유물로 존치하고 있다. 중앙청은 일제의 잔재라며 철거하고 저 독립문은 오히려 사적유물로 보존하며, 이완용은 매국노라며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면서 서재필은 민족의 선각자로 추앙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과거란 되돌릴 수는 없는 역사요, 우리의 선조들과 그들 선조들이 무슨 일을 벌여 왔는가를 살펴보고 서로 반성할 것은 반성하되 우리 입장에서는 "친일파"라면 무조건 매국노 취급하는 시각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조선에게 청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개화시켜 준 일본이 좋은 이웃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 임금이 임금 노릇 제대로 못하고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 역시 제 잇속만 챙기다가 결국 청나라 속박에서 벗어난 것도 잠시 다시 일본의 속박에 들어간 것이다.

우리가 그들 선조들의 흑심만 탓하고 우리 선조들의 무지몽매함을 묻어둔 채 "당신 조상들에게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당했다"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국민들은 덩달아 부화뇌동 하는 일을 되풀이 하는 한 그들 역시 "당신 조상들이 못 나서 그렇다"고 반발 할 것이다. 일본인들은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신사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고, 내가 만나 본 일본인들은 소문대로 정직하고 성실했다. 그러한 그들과 친해져서 우리가 밑질 것은 없을 것이다.

일본을 욕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앞으로라도 국가지도자들은 물론 국민 스스로가 자각하여 내적으로 힘을 기르며 외적으로는 그들과 우호적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할 것으로 본다. 우리는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했었는가에 대해서만 따지길 좋아하지 우리가 지금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있는 동남아시아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특히 같은 민족인 중국 조선족들에게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독립운동의 요새는 '독립문' 아닌 <서대문 감옥> 이다."

3·1 운동 89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조선 독립과 역사적 상징에 의혹이 제기됐다. 독립의 성지로 알려진 독립문이 일제의 잔재라는 것이다. 서대문감옥 원형복원 연구회 홍헌일 회장은 “독립문은 식민지의 상징이며 서대문감옥이야 말로 민족정기의 상징”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독립문과 서대문 형무소를 묶어 독립문 공원으로 만드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판단이다.

홍 회장은 독립문이 세워진 시기에 주목한다. 청·일 전쟁(1894~95)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듬해 지어진 독립문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건축됐다. 독립문이 아니라 일본의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홍 회장은 “독립문은 일본이 직접 보수공사를 하며 정성스럽게 관리했다. 독립문 편액을 작성한 사람도 매국노 이완용”이라고 설명했다. 서대문 형무소는 만해(萬海) 한용운을 비롯한 독립투사 수만 명이 옥고를 치른 민족 독립투쟁의 현장임을 거듭 환기했다. “한반도 주권을 강탈하고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피땀을 흘린 그 곳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운동의 요새”라고 못박았다.

홍 회장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독립문 공원의 일부로 개관됐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일제의 잔재인 ‘형무소’라는 단어 대신 ‘감옥’으로 명칭부터 바꿔야 한다고 꼬집었다.“‘독립문공원’을 조성한다며 잔디를 깔고 세련된 외경으로 탈바꿈시킨다고 해서 아픈 역사까지 아름다워질 수는 없다. ‘서대문감옥’을 원형 그대로 복원해 진정한 독립의 의미를 되새겨야한다”고 촉구했다.
윤근영기자 ⓒ 뉴시스통신사


◈ 영은문주초(迎恩門柱礎)

-종    목  사적  제3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945

조선시대에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모화관 앞에 세웠던 주춧돌이다. 개화기에 우리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다짐하는 의미로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면서 그 기둥을 받치던 밑돌인 주초만 남게 되었다. 모화관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처음 세우고 모화루라 하였는데, 그 뒤 세종 12년(1430)에 모화관이라 이름을 바꾸고 그 앞에 상징적인 의미의 홍살문을 세웠다. 중종 32년(1537)에 홍살문보다 격식을 갖춘 형식의 문을 만들고 ‘영조문’이라 하였다가, 중종 34년(1539)에는 중국 사신의 건의로 영은문이라 이름을 고쳤으며, 연주문, 연은문이라고도 하였다.

중종 때 만들어진 문은 1칸 규모이며 두 개의 긴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우진각지붕을 얹었는데, 지붕은 청기와로 덮고 각종 동물 모양을 조각한 잡상을 배치하였다. 남아 있는 2개의 주초는 2단의 사각형 받침돌 위에 기둥처럼 길게 세워져 있다. 위에 놓인 받침돌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1896년 독립문이 세워지면서 주초만 그 앞에 세워두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독립문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조선시대 대명(對明) 사대외교(事大外交)의 표상물인 모화관(慕華館) 앞에 있던 일각문(一脚門)터의 주초석(柱楚石)이다. 1896년(건양(建陽)1)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자주독립의 결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영은문 철거와 독립문의 건립을 발의하고 국민의 지지와 국왕의 동의를 얻었다. 때를 같이하여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하여 독립관(獨立館)이라 부르고,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낸 후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館)을 세우게 되자 영은문의 기둥을 받쳤던 초석만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명(明)의 사신(使臣)을 영접하던 건물인 모화루(慕華樓)를 지금의 위치인 서대문밖에 처음 세운 것은 태종(太宗)7년(1407)이다. 세종(世宗) 12년(1430)에는 모화관(慕華館)으로 개칭하고 그 앞에 홍살문(紅箭門)을 세웠다. 중종(中宗)31년(1536) 김안로(金安老)의 주청(奏請)으로 격이 낮은 홍살문을 헐고 청기와를 얹은 영조문(迎詔門)을 세운 것이 영은문(迎恩門)의 전신(前身)이다.

중종(中宗) 34년(1539)에 명나라의 사신으로 온 설정총(薛廷寵)이 이르기를 "사신(使臣)이 올 때에는 조칙(詔勅)이나 상사(賞賜)등을 가지고 온다. 그러므로 다만 영조(迎詔)라 하는 것은 타당한 것 같지 않다"라고 말하고, '영은문(迎恩門)'이란 이름을 써서 이를 걸도록 한 것이다. 선조(宣祖) 39년(1606)에 명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와서 문의 액판(額板)을 다시 써서 그 낙관(落款)에 《흠차정사김릉주지번(欽差正使金陵朱之蕃)》이라 하였다. 영은문(迎恩門)이라는 이름은 '연주문(延柱門)' 혹은 '영은문(迎恩門)'으로도 표기되었음을 고지도(古地圖)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주초는 1896년 독립문(獨立門) 공사시 독립문 앞에 남게 되었으나, 1934년에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놓았다.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1979년에 이 앞을 가로지르는 성산대로가 개설되면서 독립문과 함께 원위치에서 서북방으로 약 70m 지점에 옮겨 세워져 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는 영은문은 두 개의 기둥을 세운 1칸 규모로, 지붕에는 청기와를 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철거되기 전의 모습인 1890년의 사진자료에 따르면, 문은 두 개의 장초석(長礎石)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을 걸고 평방위에는 6구의 다포작(多包作)을 배열했다. 겹처마에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용마루는 회를 높이 바른 양성을 두었고, 용마루 양 끝에 취두(鷲頭)를 추녀마루에는 잡상(雜象)을 얹었다.

양 기둥사이에는 낙양(落陽)으로 장식하고 그 위에는 풍혈이 새겨진 인방재가 있고, 중앙에 '영은문(迎恩門)'이란 편액(扁額)이 걸려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주초석(柱礎石)은 화강석(花剛石)으로, 네모난 지대석(地臺石)과 대석(臺石) 그리고 네모난 높은 초석(礎石)으로 구분하여 깎았는데, 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좌우로 2구씩 새겨져 있다. 이 위에 민흘림을 가진 장초석(長礎石)이 모각되어 있는데 사방의 모를 약간씩 죽였다. 초석상면에는 목조가구(木造架構)를 고정시켰던 홈이 패어있고 또 상부 언저리에는 철 띠를 돌려 초석(礎石)의 파손(破損)을 방지(防止)한 것 같다.



http://gan.wikipedia.org/wiki/%E8%BF%8E%E6%81%A9%E9%96%80



迎恩門(朝鮮話:영은문,Yeong eun mun)係位到韓國首爾嗰一隻門,起先佢係用到歡迎中國皇帝派到朝鮮嗰大臣用嗰。作為冊封國,朝鮮王朝要在迎恩門迎接中國皇帝嗰使者。

1895年嗰下關條約之後,李氏朝鮮脫離清朝嗰冊封體制,成立大韓帝國,迎恩門也就嗰拕剷吥嘍。仰上哈做起嘍獨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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