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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November 18, 2011

Photo Collection of Murayama Chijun 村山智順 6 Worships 庶民と祈り

http://www.flet.keio.ac.jp/~shnomura/mura/contents/album_6.htm


VI. 庶民と祈り
Worships

118.ムーダン(1) Mudang,


119.ムーダン(2)


120.ムーダン(3)


121.済州島の神房


122.クッ。
踏刃舞の一場面。開城。


123.クッの楽士


124.済州島のクッ
済州島の海辺の神堂は、この図のように、石囲いの空間であることが多い。李中春(イジュンチュン)神房によると、北済州郡のどこかの竜王迎え(ヨワンマジ)クッの一場面で、これは実際の祭儀であろうという262)。この写真は『朝鮮の巫覡』に「野祭(済州)」として掲載されている263)。【餌】
(2001年4月30日追記)


125.済州島の個人クッ。


126.平安南道のムーダン


127.雨乞い。慶州の巫女たちによる雨乞い。
川辺に祭壇を設け、龍の絵や船などを準備し踊りを踊った。

128.羅州の神庁



129.江原道江陵の別神クッ。


130.別神クッ(2)


131.江原道江陵の別神クッに用いられた祭物


132.子授けの岩(1)。
ソウル仁旺山にある夫婦岩。


133.子授けの岩(2)。
京畿道高陽郡恩平面付巌里。


134.子授けの石仏。
京畿道開城大聖面旧邑里の弥勒仏。これに子を祈る。


135.四月八日の観燈(1)
村山によると、四月八日の晩は燈夕といって夕刻、各イエで紙で作った灯籠に火を点じる。そして男女は競って高いところにのぼり、ながめる。これを観燈という。開城が本場であったが、今では京城でもさかんにおこなわれている125)。この写真は『朝鮮の習俗』に「観燈」として掲載されている126)。【朝鮮風習42 観燈 一四 、年行 六八ページ上】
(2001年4月30日追記)


136.四月八日の観燈(2)
京畿道開城の四月八日。数多くの灯籠が吊されている。【四月八日、燈夕、開城】
(2001年4月30日追記)


137.長(1)


138.長(2)。
天下大将軍。


139.長(3)


140.長(4)


141.禾竿(ナッカリデ)
南部では、正月十五日にペッカリという竿を立てる(巨済島附近では正月十四日夕、蔚山では十五日早朝、忠南唐津でも十五日早朝)、竿の上部には藁苞を結びつけ、その上に幣竹笹などを下げ、その下には左綯いの縄に「藁の根元の方を、所々出したもの」をつける。これは稲の象徴である。二月一日に全部取り外す。豊作の祈りで、京城付近でもかつてはあった94)。写真では頂に藁苞のようなものがみえる。【梱猿軒 (禾竿) 蔚山 11ノ一】
(2001年4月30日追記)


142.天然痘よけ(1)。
ムラの入口に立てられた、天然痘除けの木。


143.天然痘よけ(2)。
ムラの入口に立てられた、天然痘除けの木。


144.茂朱のヨンドゥン婆さん迎え。
全羅北道茂朱のヨンドゥン婆さん迎えの祭壇。 木の股の上に壺を置く


145.慶尚道尚州(サンジュ)の洞神木
この写真は京城帝大民俗参考室所蔵写真である。【慶北、尚州 洞神木(民)】
(2001年4月30日追記)


146.河回(ハフェ)の三神堂(サムシンダン)
慶尚北道安東郡豊川(プンチョン)面河回洞(ハフェドン)の三神堂。河回は柳氏を中心とした両班村。三神婆さん(サムシンハルマン)は産神で、ケヤキの大木が神体である。三神婆さんは、ムラの女神(城隍任、15歳の時夫に死に分れてカミとなった)の姑に当たると信じられていて、別神(ピョルシン)クッのときなどには毎朝、丁重なもてなしを受けた(写真112,113参照)。三神は「この洞の創設当時からある部落神であるが、城隍任が来てから自分は洞神たる地位をこの嫁神に譲った」のだという22)。
三神堂に詣でて子を祈ることは朝鮮朝の時代にもよくみられたようである。『東国歳時記』には、忠清道鎮川の習俗をあげている。すなわち三月三日から四月八日にいたるまで、婦女たちが巫を連れて、牛潭の上(ほとり)の、東西竜王堂および三神堂にいき、祈子する。四方からくる女人は絡績として絶えない。またここにやってきて観る者もまるで市のごとくである。毎年このようである23)。
また、巫女のクッとしてもよくおこなわれていたようで、京城付近およびその以北では「三神祭(クッ)」が、また南鮮地方では「帝王迎(マジ)」がもっとも広くおこなわれる祈子神事だという。そして「三神は産神(朝鮮では胎の音三と同じ)であり、帝王は天の玉皇上帝で、何れも人に生命を授くる神と信ぜられて居る」と村山は述べている24)。
朝鮮の民間で子授けとかかわる個人祭は以上のほかにもなお多々ある。たとえば、正月あるいは随時に主婦や巫女が主となっておこなう竜王祭の目的のひとつに祈子ということがある25)。また慶尚南道晋州地方では、山神に子を祈る。すなわち「正月十四日の暁に夫婦して山に上り、山神を祭って一睡もしなければ男児を生むが、しかし夫婦とも心身清浄」でなければならない26)。また、七星神に対して子を授かること、あるいは子の生長を祈るのも一般的である。全羅南道和順(ファースン)郡の千仏千塔(図版213以下参照)で名高い大草里の山中には七星岩(チルソンアム)があり、ここでは祈子、長寿などを祈っている 27)。
このように、朝鮮の個人祭は何かと子供の誕生や生育と関係していたが、今日、朝鮮半島の陸地部では祈子のためのクッはほとんどみられない。この意味では以上の村山の記述は1930年代のひとつの証言として貴重だといえよう。
河回の三神堂の全体を撮した写真は『部落祭』に「洞神壇(三神)(慶北・安東・河回)」として掲載されている28)。【慶北 安東 河回、三神木、一部拡大】
(2001年4月30日追記)


147.城隍堂の将軍神
虎に跨るのはふつうは山神だが、村山は将軍神とする。この写真は『部落祭』に「城隍堂内将軍神(咸南・安辺)」として掲載されている281)。【咸南 安辺 城隍堂内将軍神】
(2001年4月30日追記)



148.「城隍堂の将軍神」

147と同じ地の図像。
(2001年4月30日追記)


149.147と同じ。
(2001年4月30日追記)


150.閣氏あそびの人形。
女の子たちのやる閣氏あそびの人形。


151.徳物山上の崔塋(チェヨン)将軍と愛妾
この写真は『朝鮮の巫覡』に「将軍堂神壇(開城徳物山)」として、また『朝鮮の鬼神』に「巫の勧請せる鬼神(彫像)」として掲載されている269)。【巫の勧請せる鬼神(彫像)】
(2001年4月30日追記)


152.開城徳物山上の夫人堂
左側が崔塋の夫人。秋葉隆によると、夫人堂が別にあるのは「生前その夫婦仲が良くなかったからであると云はれている」とのこと270)。崔塋という男神をまつる以前にこの山には女神がいて、これが「夫人」として隠然たる力を維持していたのだろうか。この写真は『朝鮮の巫覡』に「夫人堂神壇(開城徳物山)」として掲載されている271)。
(2001年4月30日追記)



153.ムーダンの勧請する鬼神彫刻


154.国師堂

ソウル南山。


155.ソナン堂と供物


156.ソッテ(1)。
市場を守るソッテ。慶尚南道郡北。


157.済州島のソッテ
これは済州市梨湖洞の防邪塔の上部のものであろう。この防邪塔はムラから西北の方(東シナ海方面)に向かって今日もなお存在している(参考図版参照)。【済州島涯月ヨリ翰林ニ入ル所ノ左側ニアリ 金陵里 (津村氏贈)】
(2001年4月30日追記)


158.ソッテ(3)


159.黄昏のソッテ。
大田市内にあったソッテ。





ムーダン(巫堂、무당)というシャーマンがクッ(굿)という祭儀を行う。
Korean shamanism, today known as Muism (Mugyo, "religion of the Mu")[1][2] or sometimes Sinism (Shingyo, "religion of the gods", with shin being the Korean character derivative of the Hanja),[3] encompasses a variety of indigenous religious beliefs and practices of the Korean people and the Korean sphere.[4] In contemporary South Korea, the most used term is Muism and a shaman is known as a mudang (무당, 巫堂) or Tangol (당골). The role of the mudang, usually a woman, is to act as intermediary between a spirit entity, spirits or gods and human beings.
Women are enlisted by those who want the help of the spirit world. Shamans hold gut, or services, in order to gain good fortune for clients, cure illnesses by exorcising negative or 'bad' spirits that cling to people, or propitiate local or village gods. Such services are also held to guide the spirit of a deceased person to higher realms.
Koreans, like other East Asians, have traditionally been eclectic rather than exclusive in their religious commitments. Their religious outlook has not been conditioned by a single, exclusive faith, and even though many Koreans converted to Buddhism when it was introduced to the country, the influence of Muism was still strong even among Buddhists. This changed during the long period of Korean history[5] during the later colonial period, when Christian missionaries demonised mudang and Muist followers,[6] and since the significant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South Korea between the 1960s and the 1990s. However, in 2007 a resurgence of Muism in South Korea was reported, where it is practised by around 8% of the population.[5][6][7] In North Korea roughly 16% of the population is Muist.[8]
Korean shamanism is distinguished by seeking to resolve human problems through a meeting of humanity and the spirits. This can be seen clearly in the various types of gut (굿) that are still widely practiced. Korean shamans are similar in many ways to those found in Siberia, Mongolia, and Manchuria. They also resemble the yuta found on the Ryukyu Islands, in Japan. Jeju Island is also a center of Korean Shamanism.[9] Muism has exerted influence on the basis of some of the Korean new religions, such as Cheondoism.[citation needed]
According to various sociological studies the strong similarity and convergence of native Korean shamanic mythos and the Christian core have favoured the spread of Christianity in South Korea, and even shaped the intimate features of the Korean Christian approach.[10]


작두 타는 무당
Trailer of "MUDANG"


韓国のシャーマニズム、「ムーダン」(巫堂)を取材したドキュメンタリー・ビデオ
Mudang: Reconciliation Between the Living and the Dead:邦題『霊媒』 (2003)
の本編の一部です。つべより。予告編→sm16662811

韓国では仏教・儒教・キリスト教以前に、このような土着の霊媒祈祷師の伝統があり
それが韓国系宗教がカルト化するひとつの要因でもある、と言われています。
(実際、韓国系新興宗教にはこのムーダンの要素がよくみられます。

この場面では、霊を先祖のもとに送り届けるための儀式が描かれています。


무 (종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무(巫)는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Shamanism) 즉, 무당으로 불리는 중재자가 신령과 인간을 중재하는 종교이다. 숭배 대상은 자연의 정령, 중국의 유명 인사, 토착 신령과 조상신 등이 숭배된다. 고대 몽골 지역에서 처음 발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용어

한국에서는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을 무속(巫俗), 무교(巫敎),무(巫)라고 하는데,이들은 고유의 관점이 존재하는 말들이다. 무속은 불교학자 이능화가 샤머니즘을 전통적인 관습으로 이해하여 처음 사용한 말이며, 지금은 국문학자들과 민속학자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 무교는 개신교 신학자 유동식이 처음 사용한 단어이며, 샤머니즘을 기독교, 불교, 이슬람처럼 독립된 종교로 존중하는 중립적 입장의 종교학자들이 사용한다. 무(巫)는 인류학자 조흥윤이 사용한 말이며, 한국의 샤머니즘을 독특한 개성을 가진 전통으로 존중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1]

[편집]개요

무는 일종의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 원시 신앙과 기타 종교 요소가 결합한 형태로 그 기원은 원시인들의 샤머니즘 의식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춤추는 샤먼의 그림이 있으며, 청동기 시대는 제정 일치 사회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정치 집단의 지도자가 종교 집단까지 거느렸는데 이들이 족장이며 또한 제사장이었다. 이들이 거행했던 의식이 무의 기원이 된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무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고조선 때로 잡는다. 조선 시대 한 무속 관련 책을 보면, 단군은 특이하게도 무를 집행하는 사람인 무당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군 왕검에서 왕검은 제정 일치 사회의 제사장, 즉 종교의 우두머리도 뜻하니 틀린 주장은 아니다. 이후 농업이 더욱 발전하고 고조선 멸망 이후 여러 국가들이 세워진 후에, 제천 의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제천 의식은 문화적 특질과 종교적 특질 모두를 가지고 있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고대국가 부여, 고구려, 예, 마한 등의 나라가 모두 제천의례를 거행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마한의 천제는 신라와 고려대에 이르러 팔관회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었다.

유학이 조선의 기본 이데올로기가 됨에 따라 무에 대한 탄압이 가해져 무당이 천민으로 전락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탄압받았다. 성리학이 지배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도 무당들은 사람들의 질병을 돌볼 때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벌을 주라고 할 정도로 치유능력이 있는 자로 여겨졌다.[2]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미신으로 간주되어 거의 사라졌고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무 또한 박정희 정권 당시 벌어진 소위 '미신타파운동'으로 탄압받았다.[3]

[편집]역사

이 부분은 토막글입니다. 서로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편집]고조선
무는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된 종교인데, 무의 기원은 우리 역사의 시작인 고조선 시대부터 잡는 것이 보통이다. 고조선 시대를 상징하는 우리의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를 보면, 곰과 호랑이가 나오고 천신의 자손 환웅이란 용어가 나온다. 이외에도 태백산, 신단수 등을 신성시하는 것으로 보아, 애니미즘, 토테미즘 등을 그 시대에 믿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는 제정 일치 사회였으므로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가 일치했는데, 단군 왕검에서 왕검이 제사장을 뜻하는 용어인 것을 보면 샤머니즘까지 신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샤머니즘은 지금도 무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편집]삼국 시대와 고삼국 시대
고삼국 시대 삼한과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등 여러 국가에서는 제천 의식을 비롯한 여러 종교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도 일부 남아있는 솟대나 당산목 등이 이 때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솟대는 새를 꽃은 나무로 새를 하늘과 땅의 중개자로 보는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농업이 철기의 사용으로 발달되고 국가 간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고대 국가들은 백성들을 단합한다는 취지에서 큰 종교 행사를 열었는데, 이것이 제천 의식이다.

[편집]강신무와 세습무

무에서 신령과 사람사이를 이어주는 중재자 즉, 샤먼을 무당(巫堂)[4]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무당을 당골이라고도 부르며, 크게 강신무와 세습무로 나눈다. 강신무는 현재 북한 지역에서, 세습무는 남한에서 전해졌다. 강신무는 일반인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무병을 앓게 되고 내림굿을 통해 신내림을 받아서 신령을 몸주신으로 모시는 무당을 일컬으며, 세습무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소화처럼 집안 대대로 무당으로 일한 무당을 말하는데, 자녀는 부모의 내림굿으로 몸주신을 모시게 된다.

광복 이후 세습무들은 조선시대때 무당이기 때문에 받던 괄시를 피해, 무당 집안임을 숨기는 일이 많아졌고, 한국전쟁때 북한에서 미신을 금지하는 북한정부의 탄압을 피해서 내려온 강신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 현재 세습무는 거의 사라졌고 대부분의 무당은 강신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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