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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y 8, 2012

Yu Gwan-sun 柳寛順,independence heroin killed by Japan colonial

柳 寛順(ユ・ガンスンまたはグヮンスン、朝鮮語: 유관순、1902年11月17日 - 1920年10月12日)は日本統治時代の朝鮮で独立運動をしたとされる女性活動家。






http://www.i815.or.kr/html/en/activities/activities_04_04.html
Prison-service Record of Yu Gwan-sun




http://blogs.yahoo.co.jp/minechu1/29110466.html


유관순[柳寛順]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78030&v=42
を訳してみました。



유관순[ 柳寛順 ]

1902∼1920.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흥(高興). 충청남도 천안 출신.
1902~1920。独立運動家。本貫は高興。忠清南道天安出身。


아버지는 중권(重權)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父親は重權で、母親は李氏だ。


1916년 기독교감리교 공주 교구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 교비생으로 입학하고,
1916年基督教メソジスト教公州教区の米国人女性宣教師の助けで梨花学堂校費生として入学して、

기독교 [名] 基督教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1919年3・1運動が起こるとこの学校高等科1年生として万歳デモに参加した。

시위 [名] 示威、デモ



이 날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이자 맨앞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하게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この日数千名の群衆が集まると先頭で独立万歳の音頭を取って激しく独立万歳デモを展開した。

맨 [冠] 一番、最も
선창 [名] 音頭をとること
격렬 [名] 激烈


이 시위에서 일본 헌병의 총칼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このデモで日本の憲兵の銃剣に父親と母親が殺されて、

헌병 [名] 憲兵
총칼 [名] 銃剣
피살 [名] 殺されること
-당하다 [尾] ・・・される


그녀는 아오내 만세시위 주동자로 잡혀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오내万歳デモのリーダーとして捕らえられ日帝のむごい拷問を受けたが最後まで屈しなかった。

그녀는 아오내は何でしょう?

잡히다 [自] 捕らえられる
무자비하다 [形] 無慈悲だ、むごい
끝내 ⇒ 끝끝내 [副] 終りまで、とうとう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公州地方裁判所で懲役3年の刑を言い渡されたがこれに不服、控訴して경성복심裁判所で裁判を受ける時

경성복심は何でしょう?

법원 [名] 法院 → 裁判所
형 [名] 刑
언도 [名] (判決の)言い渡し
항소 [名] 控訴


소리높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 항의하였다.
声を張り上げて独立万歳を叫び日帝の韓国侵略を糾弾、抗議した。

높이다 [他] 高める
부르다 [他] 叫ぶ
항의 [名] 抗議


그리고 일제의 법률에 의해 일제 법관에게 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そして日帝の法律によって日帝の裁判官に裁判を受けることを不当だと

법률 [名] 法律
부당하다 [形] 不当だ


강력하게 주장하다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強力に主張して法廷侮辱罪まで加算され懲役7年の刑を言い渡された。

강력하다 [形] 強力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에도 틈만 있으면 큰소리로 독립만세를 불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西大門刑務所で服役中にも機会があれば大声で独立万歳を叫んで、そのたびごと刑務官に引っ張られて残忍な悪刑を受けた。

악형は悪刑? 拷問のこと?

복역 [名] 服役
틈 [名] 機会、暇
마다 [助] ごと
끌려가다 [自] 引っ張られる
모질다 [形] 残忍だ


그렇듯 불굴의 투혼으로 옥중 항쟁을 계속하다 1920년 19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そのように不屈の闘魂で獄中抗争を続けて1920年19歳の歳でとうとう西大門刑務所で獄死した。

투혼 [名] 闘魂
항쟁 [名] 抗争


유관순이 참살된 지 이틀 뒤에 이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푸라이와 월터 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柳寛順が참살된から二日後にこの知らせを聞いた梨花学堂校長プライとウォルター先生は刑務所当局に

참살된は何でしょう?

이틀 [名] 二日


유관순의 시체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柳寛順の死体引き渡しを要求したが、日帝はこれを拒否した。

거부 [名] 拒否


유관순의 학살을 국제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위협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석유상자 속에 든 시체를 내주었는데,
柳寛順の虐殺を国際世論に訴えようと脅かして強力に抗議して석유상자中に置かれた死体を渡したが、

석유상자は何でしょう?

학살 [名] 虐殺
호소하다 [名] 訴える
위협하다 [他] 脅かす


열어 보니 토막으로 참살된 비참한 모습이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開けてみると切れ端に참살된悲惨な姿だった。1962年建国勲章が授与された。

토막으로は「切れ端に」?「切れ端として」? 참살된の意味が分かれば토막으로も分かるのかな・・・?

토막 [名] 切れ端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61102012016
2006-11-02 12면

日帝 유관순열사 순국 뒤 시신 토막 옥중 여성 열사들 성고문도 자행

일제가 강점기 당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토막내 훼손하고, 독립운동을 하다 옥에 갇힌 여성 열사들을 성고문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같은 사실은 1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개관 8주년을 맞아 연 학술심포지엄 ‘3·1운동기 여성과 서대문형무소’에서 밝혀졌다.

서대문구(구청장 현동훈) 주최로 열린 심포지엄에서는 여성 열사들의 옥중투쟁과 일제의 잔인한 고문상이 낱낱이 드러났다.

‘유관순 열사와 서대문형무소’를 발표한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유관순 열사를 비롯, 여성들이 받은 고문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밝혔다.

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열사는 옥중에서도 만세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1920년 3월1일에는 3·1운동 1주년을 기해 옥중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유관순 열사는 이 일로 심한 고문을 당해 방광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고, 그해 10월 순국하게 된다.

이틀 뒤에야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미스 프라이와 미스 월터가 형무소장에게 시신 인도를 요구하자, 일제는 시신 상태를 세상에 알리지 말 것 등의 조건을 붙여 마지못해 석유상자에 넣은 시신을 넘겨줬다. 김 관장은 발표문 중 ‘고문방에서 토막살해 설도’라는 소주제에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이 머리와 몸통, 사지 등 여섯 토막으로 잘려 있었고, 코와 귀도 잘려 있었다는 기록을 소개했다.‘간수들은 유관순이 고문에 못이겨, 아니 고문으로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살해 가능성을 언급하는 문헌도 인용했다.

일제의 만행은 단순히 물리적인 폭행에서 그치지 않았다. 김 관장은 “간수들이 말린 황소의 생식기를 고문도구로 사용하다 좀처럼 굴복하지 않는 여성 열사들이 있으면 이 도구를 이용해 성기를 훼손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대동단 단원이었던 이신애 열사는 서간문과 구술자료에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악명높았던 종로경찰서 미와 경사가 면상을 세게 내리치자 아래턱이 퍽 소리와 함께 왼편으로 돌아가 붙어버렸다. 아이쿠 하려 애를 써도 그때부터 전혀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신애 열사는 옥중에서 3·1운동 1주년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혹독한 전기고문을 받아 손목이 다 타버렸고, 끝내 임신도 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朝鮮近代史の中の苦闘する女性たち〉 烈士・柳寛順(上)
〈朝鮮近代史の中の苦闘する女性たち〉 烈士・柳寛順(下)
http://japanese.joins.com/article/426/24426.html?sectcode=&servcode=

「柳寛順への日本の蛮行、誇張多い」 
2002年02月26日21時21分
[ⓒ 中央日報/中央日報日本語版] comment0mixihatena0
「柳寛順(ユ・クァンスン)烈士について誤って理解されている点を正してみたかったのです」。この4年間、柳寛順研究に没頭してきた郷土史家の任明淳(イム・ミョンスン、55、忠清南道天安市社稷洞)さん。

天安(チョンアン)大にある柳寛順研究所の客員研究員でもある任さんは「柳寛順に関連した内容が、1945年8月15日の解放以後、植民地時代に日本が行った蛮行を糾弾するという意味合いから、誇張され過ぎてしまった感がある」と主張する。

「三一運動=柳寛順」というイメージを持つ柳寛順だが、出生・死亡年月日は記録によってまちまちだ。名前の漢字表記や兄弟の数、梨花(イファ)学堂に入学した年度も、やはりそれぞれ異なっている。

天安一帯で起った「己未年万歳示威」では、20人余りが殉国した。だが、死亡して80年が経てば、戸籍が整理され、記録から完全に抹消される。 

これを知った任さんは、99年から柳寛順ら殉国した先烈の除籍謄本をすべて集め、研究を行ってきた。

謄本によって任さんは、柳寛順の出生年が1904年ではなく1902年で、1人娘ではなく姉が1人いたという事実を確認した。任さんは昨年10月、天安大が主催した「柳寛順烈士追慕学術大会」で、我々が知る柳寛順の殉国月日と生年月日が事実とは異なる、と指摘した。

任さんは、柳寛順の最終刑量は、懲役7年でなく3年だったと主張した。京城(キョンソン)復審裁判所(控訴審)の判決文と受刑者記録表によると、柳寛順は小学校の教科書にあるように「検事に椅子を投げつけたため法廷冒とく罪が追加され、7年の刑を宣告された」のではなく、3年の刑を受けたという。その後、柳寛順は高等裁判所(現在の最高裁)に上告せず、これが最終刑量になったという。

「梨花学堂時代、柳寛順の級友だったポガック(99、僧侶)さんの証言によると、死亡して20日余り過ぎた後、柳寛順の死体を受け取ったそうです。その時、死体は腐っていましたが、四肢は切断されてはいなかったという話です」。

任さんは「柳寛順への盲目的な思い込みから、こうしたいい加減な事実が広まり、子供向けの伝記にまで掲載された」とし、「今は、冷静になって史実を確認すべきだ」と話した。

大学で農学を専攻した任さんは、農村振興庁で勤めた経験があり、20年余り自営業(農薬販売)を営んできた。だが現在は、天安地域の郷土史研究に没頭している。

http://homepage2.nifty.com/hashim/seoul/seoul00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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